VOLUME II · UNIT V · LESSON 01

왜란·호란 이후 체제의 재정비

두 차례 전란으로 황폐해진 조선. 대동법으로 백성의 짐을 가볍게 하고, 영조의 탕평으로 붕당을 잠재우며, 정조가 화성에서 새 시대를 꿈꿨다. 17~18세기 조선 후기 부흥의 시간.

LEARNING GOAL성취기준
9역12-01 조선 후기 경제 제도(대동법·균역법)와 정치 변화(탕평·붕당)를 살펴보고, 영조·정조의 개혁을 이해한다.
SECTION · 01

대동법과 균역법 — 백성의 부담을 줄여라

전란 후 가장 큰 문제는 세금이었다. 농민이 너무 많은 부담을 짊어졌고, 양반은 세금을 거의 내지 않았다. 광해군부터 영조까지 약 150년에 걸쳐 두 개의 큰 개혁이 진행되었다.

💰 조선 후기 세금 개혁 — 100년의 여정

DAEDONG · 대동법

대동법 (1608~1708)

광해군 → 숙종 · 100년

이전에는 공물(특산물) 부담이 너무 컸다. 곶감·인삼·꿀 등 — 백성이 잘 모르는 것까지 바쳐야 함. 게다가 중간 상인(방납)이 가격을 부풀려 폭리.

개혁: 모든 공물을 토지 1결당 쌀 12두로 통일. 결과 — 백성의 부담↓, 토지 많이 가진 양반의 부담↑. 상품화폐 경제 발달의 토대.

GYUNYEOK · 균역법

균역법 (1750)

영조 · 군포 부담 절반으로

이전에는 군대 면제 대가로 1년 군포 2필을 냈다. 농민에게 큰 부담. 양반은 면제.

개혁: 군포를 1필로 줄임. 부족분은 결작(토지에서 추가 징수)·선무군관포(양반 자녀 군포)·어염세 등으로 보충. 그러나 근본적 해결은 아니었다.

SECTION · 02

영조와 정조 — 탕평의 시대

17세기 후반부터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갈라지며 붕당 정치가 격화되었다. 숙종 시기 환국(권력 교체)이 잦아지면서 사회가 흔들렸고, 영조가 마침내 탕평을 선언한다.

영조
영조 (재위 1724~1776)조선 역대 최장 재위 52년. 탕평·균역법.
정조
정조 (재위 1776~1800)사도세자의 아들. 규장각·수원 화성.
정조 화성 행차
정조 화성 행차도 (1795)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 8일간 6,000명 대행렬.

📜 영조·정조의 개혁 (1724~1800)

1724
영조 즉위 — 노론·소론의 위기
숙종 후 경종 시기 노론·소론의 대립이 극심. 영조는 즉위 즉시 "내가 다스리는 동안 다시 환국이 없을 것"이라 선언.
1742
탕평비 건립
성균관 입구에 탕평비를 세움. "두루두루 사랑하고 편당하지 말라(周而不比·乃君子之公心)". 영조 정치의 좌표.
1750
균역법 시행
군포 2필을 1필로 줄임. 농민의 짐을 가볍게.
1762
사도세자의 비극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이선)가 정신적 문제를 보이자 영조가 뒤주에 가둬 8일 만에 죽임. 한국사 최대의 비극 중 하나. 그 아들이 훗날 정조.
1776
정조 즉위 · 규장각 설치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며 즉위. 규장각을 설치해 인재를 양성하고 정책을 연구. 정약용·박제가 등 실학자들이 이곳에서 활약.
1791
신해통공 — 시전 상인 특권 폐지
육의전 외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난전 단속권) 폐지. 소상인의 자유로운 영업 허용 → 상품화폐 경제 발달 촉진.
1796
수원 화성 완공
정약용이 설계, 거중기를 발명해 건설.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새 도시를 건설 — 정조의 정치적 이상도시.
1800
정조 갑작스런 사망 · 세도정치 시작
49세에 의문스러운 죽음. 11세 순조 즉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시작 → 영·정조의 개혁이 이어지지 못함. 조선의 황금기 끝.
SOURCE · 영조의 탕평비
성균관 앞 탕평비 (1742)

"두루두루 친하되 편당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편당하면서 두루두루 친하지 않는 것이 소인의 사사로운 뜻이다(比而不周 寔小人之私意)."

— 영조의 탕평 정치를 새긴 비석
DEEP DIVE · 사도세자의 비극

"뒤주에서 8일 — 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다"

1762년 윤 5월 13일,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칼을 내려 자결을 명했다. 사도세자가 거부하자 영조는 그를 뒤주(곡식을 담는 큰 통)에 가두었다. 8일 만에 사도세자는 굶주려 죽었다 — 28세였다.

이 비극의 원인은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사도세자의 정신적 문제(폭력적 행동·환각), 영조와의 갈등(서로 다른 정치 노선), 노론의 음모(사도세자가 소론을 가까이 함). 혜경궁 홍씨(사도세자의 아내)의 『한중록』이 이 사건을 가장 자세히 전한다.

"임금(영조)이 칼을 들고 들어와서 휘두르시고, 세자(사도세자)는 곤룡포를 찢으며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했다. (…) 임금이 명하시되 '뒤주에 들어가라' 하니, 세자가 '아바마마, 살려주십시오' 하고 울부짖었다." — 혜경궁 홍씨 『한중록』

14년 후 즉위한 정조의 첫마디 —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그가 화성을 지은 이유 중 하나는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기 위해서였다. 정조의 모든 정치는 아버지의 비극 위에서 펼쳐졌다.

SECTION · 03

수원 화성 — 정조의 꿈의 도시

1796년 완공된 수원 화성은 단순한 성벽이 아니라 정조의 정치적 비전이 담긴 신도시였다. 정약용의 과학 기술, 새 인재의 양성, 그리고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까지.

수원 화성
수원 화성 — 1796년 완공둘레 5.7km, 4대문(장안·팔달·창룡·화서). 정약용 설계, 거중기 발명, 약 2년 9개월에 완공. 1997년 세계유산 등재.
화성 장안문
장안문 — 화성의 정문전통 한국 성곽 건축의 백미.

🏯 수원 화성의 의미

PIETY · 효심

사도세자에 대한 효

사도세자의 묘(현륭원)를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고, 그 인근에 새 도시 건설. 아버지를 위한 정조의 효심이 화성의 출발점.

SCIENCE · 과학

정약용의 거중기

청에서 들여온 서양 과학을 응용해 거중기(도르래)·녹로(기중기) 발명. 노동력·비용을 크게 절약. 『기기도설』 등 청의 책에서 아이디어.

POLITICS · 정치

새 시대의 상징

한양의 노론 기득권으로부터 떨어진 새로운 정치적 기반. 화성에서 정조는 자기만의 군사·경제·문화 거점을 만들려 했다.

SECTION · 04

인물·업적 매칭

6쌍의 인물과 업적/사건을 매칭해 보자.

👥 인물 ↔ 업적 매칭 (6쌍)

0 / 6

왼쪽 인물을 클릭한 뒤 오른쪽 업적/사건을 클릭. 6쌍 모두 짝지은 후 정답 확인.

WHO · 인물/시기
광해군
영조
정조
정약용
사도세자
안동 김씨
WHAT · 업적/사건
규장각·수원 화성·신해통공
거중기 발명·수원 화성 설계·『목민심서』
대동법을 경기도에 처음 시행 (1608)
19세기 세도정치 — 정조 사후 권력 독점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죽은 정조의 아버지
탕평비·균역법·52년 재위
SECTION · 05

한 줄로 정리하면

핵심 정리

  • 대동법(1608 광해군 시작 → 1708 숙종 전국 시행): 공물을 토지 1결당 쌀 12두로 통일 → 농민 부담↓, 양반 부담↑, 상품화폐 경제 발달의 토대.
  • 균역법(1750 영조): 군포 2필→1필. 결작·선무군관포 등으로 부족분 보충.
  • 영조(1724~1776): 환국의 폐단 끝 → 탕평비(1742) 건립. 52년 재위. 비극 — 사도세자 뒤주 사건(1762).
  • 정조(1776~1800):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 규장각(1776), 신해통공(1791, 시전 상인 특권 폐지), 수원 화성(1796 완공·정약용·거중기).
  • 1800년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 → 11세 순조 즉위 → 안동 김씨 세도정치 시작 → 영·정조의 개혁이 이어지지 못함.